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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조지은 외면? 明은 인조 아닌 광해군 편이었다(광해에 대한 오해②)

뉴스엔 입력 2012. 10. 17. 16:19 수정 2012. 10. 17.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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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엔 김형우 기자]

명나라, 인조반정을 '찬탈'로 규정..광해군 복위 위해 파병도 검토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폐위되면서 서인 측이 내세운 명분은 두가지다. 하나는 어머니를 폐위시키고 형제들을 죽였다는 '폐모살제'이고, 또 하나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를 돕지 않았다는 '재조지은 외면'이다.

이 재조지은의 외면에 따르면 분명 명나라는 광해군 축출에 찬성했야 옳다.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추구해온 인물이다. 명나라는 인조라는 새로운 인물을 반겨야 함이 정황상 맞을 듯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였다.

명사(明史) 등 중국 정사 기록에 따르면 인조반정을 조선 측 입장인 '혁명'이 아닌 '찬'으로 기록하고 있다. '찬'이란 빼앗는다는 단어로 명나라는 인조반정을 인조가 왕위를 '찬탈'한 것으로 본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명나라는 인조의 책봉을 반대했다. 게다가 명나라 조정에선 "찬탈 세력을 몰아내고 광해군을 다시 세워야 한다"며 광해군 복위를 위해 군사를 보내자는 이야기도 대두됐다.

의아스럽지만 이런 기록 등은 오히려 광해군이 실리 외교를 매우 기민하면서도 성공적으로 이끌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광해군은 외교 전략으로 "대국에 예의를 다하면서 후금을 적절히 달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한쪽에 기울지 않고 명나라로부터는 '명분'을 후금에겐 '실리'를 모두 얻자는 고난이도 줄타기 외교 였지만 광해군은 이를 완벽하게 수행한 셈이다. 이는 인조반정 후 명나라의 반응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명나라는 후금과의 전쟁에 1만이 넘는 병사를 보내 명나라 군사와 운명을 같이 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데다 명나라 사신이나 조공 등에 매우 예의를 갖췄던 광해군을 높게 보고 있었던 듯 보인다.

인조는 명나라에 계속적으로 책봉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다 결국 왕위에 책봉됐는데 그 이유는 후금의 압박이 강해지면서다. 후금의 배후에 있는 조선이 전략적으로 꼭 필요한 시점까지 오게됐고 후금은 동아시아 최강 전력으로 분류되던 조선 수군(水軍)을 이용해 명나라를 압박하려 했다. 후금이 만리장성 시작점인 산해관을 넘어올 기세를 보이자 조선을 자신의 편으로 확실히 하기 위해 인조 책봉을 승인한 것이다. 오히려 재조지은이란 명분을 앞세웠던 조선과 달리 명나라는 자신들의 '실리'를 위해 조선을 이용한 것이다.

광해군은 진짜 개혁군주 였을까?

광해군에 대해 재해석이 이뤄지면서 예전 폭군에서 개혁군주라고 180도 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 대동법과 호패법 등 급진적인 서민정책이 그 이유가 됐다.

과연 광해군은 개혁군주일까. 물론 대동법과 호패법을 실시하고 간척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인 정책들은 분명 개혁적인 성향이다. 하지만 일각에선 광해군을 과대포장한다는 반대여론도 만만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그가 보여준 모습을 보면 개혁군주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대동법에 대한 광해군의 태도를 보자.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는 정초본과 중초본이 존재한다. 광해군이 물러난 후 완성된 정초본과 달리 중초본은 광해군 때 만들어진 실록이다. '승자의 기록' '서인들이 악의적으로 고쳐쓴다'라고만 하기엔 다소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없다.

중초본을 보면 광해군이 선혜청을 만들고 대동법을 실시했지만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 경우가 많다.

"경기에서 쌀로 거두는 것이 한갓 본청 하인들이 교활한 짓을 하는 소굴이 돼 구애되는 점이 많으니 먼 장래를 경영하는 방법은 아닐 것 같다. 팔도에는 절대로 경솔하게 동시에 시행할 수 없다" "나라 세금을 다 쌀로 내게 하는 것이 어찌 먼 훗날까지 헤아리는 일이겠는가. 경기 이외의 다른 도에까지 점차 미치게 하는 것은 절대 안 될 일이다"

광해군이 대동법을 그리 탐탁치 않게 바라봤다는 내용들이다. 방납배들의 행포에 대동법을 시행했을 뿐이라고도 설명했다. 광해군은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시행해달라는 상소들을 모두 거부하기도 했다.

물론 이에 대해선 반론도 있다. 지지세력인 대북파 없이는 국정을 운영할 힘이 부족했던 광해군이 당시 국가 경제를 장악하던 대북파 신료들에게 불이익을 주긴 어려웠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광해군이 일생의 업으로 생각한 궁궐복원사업 역시 비판의 대상이다. 광해군 시절 중건된 궁은 4개. 임진왜란 당시 불타 폐허가 된 왕궁이지만 단기간 내에 4개의 궁을 다시 짓는다는 건 상당한 무리수다. 궁궐건축사업은 한 국가의 역량이 총동원되야하고 이를 잘못했다 망한 나라도 여럿된다.

일부 사학가들은 광해군이 실리외교를 한 이유 역시 전쟁에 필요한 재정으로 인한 궁궐중건사업 중단 걱정에서 시작됐다 바라보기도 한다.

대략 국가재정의 20~30%를 궁궐재건에 쏟아부었는데 이는 한 국가가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고 특히 왜란으로 피폐된 국가에선 더욱 벌여선 안된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결국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세금을 과하게 올려야만 했고 매관매직은 물론 부패비리도 상당하게 나타났다.

광해군을 서민을 위한 개혁군주로 바라보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 이유들이다. (③에서 계속)

김형우 cox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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