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AS] '태권브이=마징가 표절' 아니라는 법원의 판단, '국뽕 판결'일까요?

송채경화 2018. 8. 1.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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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AS][뉴스AS] 법원 "가슴 부분 단절되지 않은 V자 로봇 흔치 않아"
누리꾼들 "그레이트마징가도 단절되지 않은 V자"
김청기 감독, "(마징가) 이미지는 따오자며 벤치마킹"
태권브이, 마징가제트 영향받은 2차 저작물로 인정해야
태권브이(왼쪽)와 마징가제트(가운데)

어린 시절 만화 ‘마징가제트’와 ‘로보트 태권브이’를 보고 자란 팬들의 흥미를 끌 만한 판결 기사가 나와 화제가 됐습니다. 한국의 로봇만화 주인공 로보트 태권브이가 일본의 마징가제트를 표절했는지 여부에 대한 법원의 판단이 공개된 건데요. 재판부는 태권브이의 가슴에 새겨진 브이(V)자가 마징가제트와는 달리 중간이 갈라지지 않았다는 이유 등을 근거로 태권브이가 마징가제트를 표절한 게 아니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습니다. 언론들은 앞다퉈 “로보트 태권브이, ‘마징가 짝퉁’ 오명 벗다” “태권브이, 마징가Z 짝퉁 이미지 벗나…” 등의 제목으로 기사를 쏟아냈죠.

그런데 누리꾼들 사이에선 “(마징가 시리즈의 하나인) ‘그레이트마징가’의 브이도 태권브이처럼 갈라져 있지 않다”며 “태권브이는 누가 봐도 마징가제트를 따라 한 것인데 이를 간과한 채 ‘국뽕(국가와 히로뽕을 합친 말로, 과도한 애국주의를 조롱하는 속어) 판결’을 내렸다”는 비판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과연 법원의 판단은 ‘국뽕 판결’이었을까요? 한 번 찬찬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7월31일 공개된 재판 결과를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이날 서울중앙지법 민사208단독 이광영 부장판사는 ㈜로보트태권브이가 “저작권을 침해받았다”며 완구류 수입업체를 운영하는 ㄱ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4천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로보트태권브이는 만화 캐릭터 태권브이에 대한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입니다. 재판부는 태권브이의 캐릭터를 함부로 사용한 ㄱ씨가 태권브이 저작권을 가진 ㈜로보트태권브이의 권리를 침해했다고 본 겁니다. (▶관련기사:‘태권V-마징가Z’ 싸우면 누가 이길까? 80년대 최대난제 풀렸다)

그런데 정작 이 판결에서 사람들의 관심은 태권브이 권리침해 여부가 아니었습니다. 소송을 당한 ㄱ씨가 재판 과정에서 “태권브이는 일본의 마징가제트 또는 그레이트마징가를 모방한 것이어서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되는 창작물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재판부가 이 주장의 사실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래서 뜬금없이 서울중앙지법 민사 재판부가 한국 사회의 오랜 논쟁거리인 ‘태권브이가 마징가제트와 그레이트마징가를 모방했느냐’의 여부를 판가름하게 됐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재판부는 ㄱ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태권브이는 마징가제트 또는 그레이트마징가와 외관상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특히 재판부는 태권브이가 독자적인 저작물이라는 핵심 근거로 태권브이의 가슴에 새겨진 V자의 모양을 예로 들었습니다. 재판부는 “(태권브이처럼) 가슴 부분에 단절되지 않은 V자가 새겨진 로봇 캐릭터는 흔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며 “마징가제트의 경우 가운데 부분이 끊겨 있고 형태도 태권브이와 약간 다르다”고 설명했습니다.

김청기 감독. SBS 화면 캡쳐

그런데 재판부의 이러한 판결에 많은 누리꾼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습니다. 마징가 시리즈의 원조인 마징가제트의 가슴에 새겨진 V자는 끊겨 있지만, 위기에 빠진 마징가제트에 이어서 후속 캐릭터로 등장해 악의 제국 미케네제국과 싸우는 그레이트마징가의 가슴에 새겨진 V자는 마징가제트와 달리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마징가 시리즈의 막내인 그랜다이저 역시 가슴의 V자가 붙어 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mark****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누리꾼은 트위터에 “판사가 그레이트마징가는 모르나 보네. 그레이트마징가는 V가 안 끊겨 있는데”라고 썼습니다. 또다른 누리꾼도 “누가봐도 모방인데 국뽕을 판결까지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태권브이 마징가제트 세대들은 모방 캐릭터인 줄 알지만 사랑해줬는데”(farm****)라고 썼습니다. “누가봐도 그 당시에 태권브이가 마징가제트를 따라 한 건 사실이지. 창작품은 절대 아니지. 일본과 국가간의 이미지 싸움이라 한국 손들어 준 것 같은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하지마라”(golf****)라는 비판도 나왔습니다.

사실 일본 로봇물의 상징이자 처음으로 사람이 탑승하는 로봇으로 유명한 마징가 제트는 1972년 12월 처음 전파를 탔습니다. 이후 그레이트 마징가가 1974년 9월, 그랜다이저가 1975년 10월 등장했습니다. 김청기 감독이 제작한 한국의 로보트 태권브이는 1976년 7월 대한극장에서 최초로 개봉했지요. 언제부터 제작에 들어갔는지도 따져봐야겠지만 일단 공개 시점만 따진다면, 태권브이는 마징가 시리즈 3편이 모두 전파를 탄 뒤에 개봉했기 때문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 태권브이를 만든 김청기 감독도 과거 인터뷰를 통해 태권브이가 마징가제트 캐릭터를 차용했다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2017년 12월 서울애니메이션 센터에서 이뤄진 인터뷰에서 김 감독은 “(마징가제트의) 이미지는 따오자. 좋은 건 따오자. (그래서) 벤치마킹한 거지”라고 얘기합니다. 2015년 SBS와의 인터뷰에서도 그는 일본 캐릭터 표절 논란에 대해 “나한테 고민은 어쨌든 마징가 냄새 안 나게 하기 위해서 했는데. 그래서 순수한 한국 애니메이션이란 목표를 두고. 이야기의 구성이나 성격 이런 것도 우리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많이 애를 썼죠”라고 했습니다. 마징가제트를 벤치마킹하되 ‘한국 애니메이션’의 독특함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는 취지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번 판결문도 자세히 살펴보면 한국의 태권브이가 일본의 마징가제트를 따라 만들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판결문에는 “태권브이가 일본의 로봇 캐릭터인 마징가제트의 영향을 받은 것임은 원고(㈜로보트태권브이) 역시 인정하고 있다”고 써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태권브이는 미술저작물 및 영상저작물로 등록돼 있는 저작물로서 마징가제트 또는 그레이트마징가와 외관상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죠. 또한 “태권브이는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권도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일본 문화에 기초해 만들어진 마징가제트 또는 그레이트마징가와는 캐릭터 저작물로서의 특징이나 개성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고도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재판부는 “태권브이는 마징가제트 또는 그레이트마징가와는 구별되는 독립적 저작물(원저작물) 또는 이를 변형·각색한 2차적 저작물에 해당한다”고 판결했습니다. 2차적 저작물이란 원저작물을 번역·편곡·변형·각색·영상제작 등 그 밖의 방법으로 바꿔 작성한 창작물을 뜻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2차적 저작물도 ‘독자적인 저작물’로서 법적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즉, 한국 법원은 애초 태권브이가 마징가제트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점을 인정하면서도 외관상의 차이 및 캐릭터의 차이를 봤을 때 ‘독자적인 저작물’로서의 법적인 지위를 인정할 만하다고 판단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법적으로 원작자의 권리를 침해한 ‘표절’까지는 아니라고 본 것이죠.

로보트 태권브이가 개봉한 지 42년이 흘렀습니다. 그 시절 한국의 애니메니션의 많은 수가 일본 캐릭터를 본따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나마 태권브이는 ‘한국의 독자적 특성’을 나타내기 위해 노력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 많은 로보트물이 일본의 것을 그대로 베껴온 것과는 다소 달랐습니다. 김청기 감독 인터뷰의 한 대목입니다.

“극장 만화영화가 사양길에 접어들고… 간담 브이는 (일본의) 마크로스를 갖다가 (표절)해서… 그때가 나한테는 흑역사다. 창피스럽고. 생각하면 얼굴 뻘게지고.”

그런 그에게 누군가 묻습니다. “감독님의 흑역사에 대해 부정적 감정을 갖는 친구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객관적으로 봐서 여러 가지 평이 나오는 건 달게 받는다. 그런 것들이 나한텐 참 부끄럽고. 내 작품 생활의 하나의 역사로 봐주셨으면 좋겠다.”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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