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월드'는 하루 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2020. 2. 15.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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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엔 '봉준호 다시보기'


전 세계적으로 ‘봉준호 영화 다시 보기’ 붐이 일고 있다. ‘기생충’ 외에도 6편의 걸작들이 있는데, 인터넷 동영상 서비스(OTT)나 IPTV에서 만날 수 있다. 왓챠플레이의 경우 오스카 수상 직후 ‘설국열차’와 ‘괴물’ 등 봉 감독 작품 5편이 1, 2, 4, 6, 7위에 올랐다. 미국의 영화 평점사이트 로튼 토마토에서도 평점 고공행진 중이다. 기생충(99%), 마더(96%), 설국열차(95%), 괴물(93%), 살인의 추억(90%), 옥자(86%) 순으로 호평을 얻었다. 이번 주말, 봉 감독의 지난 작품들을 다시 꺼내보는 건 어떨까. 안내를 맡아줄 이는 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회장인 전찬일 영화평론가다.

며칠 전 소위 ‘아카데미 효과’를 증거하는 흥미로운 기사가 보도됐다. ‘기생충’이 제92회 아카데미 4관왕에 등극하며 봉준호 감독의 이전 영화들에 대한 관심이 급상승했다는 것.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도 예외가 아니다. 벨기에 플랑드르관광청이 12일 ‘플란다스’의 원 지명인 플랑드르(Flanders) 지역의 매력을 자세히 소개했단다.

장편영화로 한정하자. ‘플란다스의 개’는 봉준호 영화세계의 어떤 출발점이다. 소품일지언정 문제의식은 ‘기생충’으로 이어지며, ‘옥자’와는 직결된다. 필자와의 과거 인터뷰에서 봉 감독은 말했다. “잘나가는, 그러한 시스템을 보여주려 했다”고. 기성세대가 되길 거부하며 미숙한 상태로 남아있는 배두나 캐릭터가 나오고, 이성재 역시 크게 다르지 않건만 결국 기성세대화되는 모습을 교차시키며 보여주는 게 목표였다고. 강아지는 사실상 영화 전체의 거대한 맥거핀, 일종의 미끼였다는 것이다.

다시 본 영화는 재평가돼야 할 문제작으로 다가섰다. ‘기생충’으로까지 지속되는 코믹 감각이나 자유로우면서도 정교한 연기, 세심한 음악 연출, ‘봉 월드’를 관류하는 노숙 모티브 등이 각별히 눈과 귀를 끌었다. 그만큼 음악이 강한 영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음악이 다채롭고 전면적이다. 중심은 재즈이나 다양한 피아노 선율들도 동원된다. 음악 활용에서, 역시 음악이 결정적 역할을 하는 ‘기생충’과 가장 가깝다. 주인공 이성재의 대표작으로도 손색없다. 봉 감독의 말대로, 그만의 “어떤 섬세한 결 같은 게” 감지된다. 아내(김호정)가 시간강사 남편을 교수로 만들기 위해 퇴직금 1648만원 전액을 내놓는 지점에서는 잊기 힘든 짠함을 안겨준다. 이래저래 영화는 저평가된 감이 없지 않다.

문득 떠오르는 의문. ‘플란다스의 개’의 실패가 없었었어도, ‘살인의 추억’(2003)의 기념비적 쾌거가 가능했을까. ‘기생충’ 이전까지만 해도 으레 21세기 최고의, 어느 조사에서는 한국영화 100년사의 최고작으로 뽑히기도 했던, 봉 월드의 정상이자 한국영화사의 어떤 전환점. 봉준호 영화의 으뜸 특징은 개인에서 출발하되 늘 그 개인사와 시대적·사회적 풍경에 대한 설득력은 물론 재미를 가득히 결합시킨다는 것인데, 그 정점에 이 걸작이 자리한다. 1980년대 대한민국의 남루함과 치사함, 폭력성, 파쇼성을 이만큼 실감 넘치게 포착한 예를 알지 못한다. 비평적 인정이나 전국 500만명을 넘었던 대중 관객들의 호응, 한국 스릴러 영화의 새 장을 열었다는 점 등에서도 그 영화사적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봉준호 감독. 최현규 기자


‘살인의 추억’의 역사적 성공은 ‘괴물’(2006)로 연결된다. ‘실미도’(감독 강우석·2003) ‘태극기 휘날리며’(강제규·2004) ‘왕의 남자’(이준익·2005)에 이어 한국의 네 번째 ‘천만 영화’에 오른, 또 다른 기념비적 성공작. 희비극적 가족물이면서, 장르영화적 재미로 무장하고 그 가족에 치명적 비극을 안기는 국가와, 그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듯한) 미국이라는 구조적 악을 향해 통렬한 비판의 화살을 날렸다는 점 등에서 ‘기생충’의 이란성 쌍둥이다. ‘살인의 추억’을 놓친 칸영화제를 비웃기라도 하듯, 비공식 병행 섹션인 감독주간이 초청해 봉준호를 세계무대에 알리는 변곡점이 됐다. 이른바 ‘칸 효과’를 톡톡히 누렸는데, 국내 1000만 고지 등극도 그렇거니와 프랑스 유명 영화 월간지 ‘카이에 뒤 시네마’가 2000년대 세계영화 4위로 꼽은 것도 그중 하나일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플롯의 정치함, 성격화·연기 등에서 ‘살인의 추억’에 미치지 못한다는 아쉬움 탓에 시큰둥해왔으나, CJ문화재단 후원으로 필자를 비롯한 다양한 영화계 전문가 38명이 참여한 ‘한국영화 100년, 한국영화 100선’에는 ‘살인의 추억’ ‘마더’와 더불어 포함됐다. 당시 600개 스크린을 ‘싹쓸이’하며 대대적 개봉을 하는 통에 한바탕 독과점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마더’(2009)는 ‘살인의 추억’의 ‘엄마 버전’격인 문제작이다. 흔히 신성시되는 모성은 본능적이자 맹목적이라는 등의 주제를 천명한다. 모성도 실은 이데올로기일 수 있다는 메시지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나, 지나치게 엄마 역 ‘김혜자의, 김혜자에 의한, 김혜자를 위한’ 영화이지 않나 싶어 또 시큰둥해했었다. 올 오스카에서 11개 부문에 최다 후보 지명되며 파란을 불러일으켰으나, 끝내 음악상과 남우주연상(호아킨 피닉스)에 그친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처럼.

작심하고 영화를 다시 보며 그러나, 그런 불만은 말끔히 가셨다. 영화는 2009년 개봉작들을 대상으로 도서출판 작가가 뽑은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최고 한국영화답다. 영화는 박스오피스에서 300만명도 채 되지 않았으나 네이버 관람객 평점에서는 9.45점으로, 9.65점(10점 만점)의 ‘살인의 추억’에 이어 전작(全作) 중 2위에 마크돼 있다. 참고로 ‘기생충’은 9.07로 3위다.

CJ엔터테인먼트가 400억원이 넘는 거액을 전액 투자해 빚어낸 ‘설국열차’(2013)는 ‘살인의 추억’ 못잖은 결실을 일궈낸 한국·미국·프랑스 합작영화다. 935만으로 1000만 고지는 넘어서지 못했어도, 대중과 비평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부일영화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등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거머쥐었다. 일찍이 평했듯 “예술과 상업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는 작가적 수작”으로 “이 시대에 꼭 필요한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상업적 예술’의 모델로서도 손색없다. ‘괴물’이나 ‘마더’를 능가한다면 과장일까. 전체적 선호도와 만족도 등에선 ‘살인의 추억’에 못 미치나, 그동안 봉 감독이 추구해 온 영화적 지향, 문제의식에선 그 걸작을 넘어선다.

반면 칸에서 조우한 ‘옥자’(2017)는 그간의 봉준호 영화들과 비교해 실망스러웠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강아지들이 모진 꼴을 많이 당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찍었다는 620억원짜리 대작 모험 드라마. 단적으로 절반의 성공이랄까. 치밀할 대로 치밀한 봉 월드에 비해, 전체적으로 허술하고 엉성했다. 하지만 ‘기생충’을 계기로 그 평가는 적잖이 바뀌었다. 그 절판의 실패가 ‘기생충’의 숙성과, 역대급 완성도에 큰 자양분으로 작동하지 않았을까, 싶어서다. 이쯤 되면 ‘봉준호 월드’를 이해하는데 미력하마나 도움이 되지 않을까.

<전찬일 영화평론가·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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