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애의 영화이야기] 영화 '작은 아씨들' 리메이크 역사 1

현화영 2020. 2. 23. 16:2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작은 아씨들’(감독 그레타 거윅, 2019) 스틸컷.
 
새롭게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작은 아씨들’(감독 그레타 거윅, 2019)이 절찬 상영 중이다. 

1868년과 1869년 미국에서 1부와 2부로 나뉘어 출판된 루이자 메이 올콧의 소설 ‘작은 아씨들’은 영화, TV드라마, 뮤지컬, 만화책,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수없이 리메이크 돼왔다. 영화로 7편이 만들어졌다고 얘기들 하는데, 미국과 영국 이외에 홍콩, 멕시코 등까지 넓혀보면 10편 이상 제작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IMDb 참고, 원작자 이름과 영화 제목으로 검색) 

이번 칼럼에서는 영화로 리메이크 된 ‘작은 아씨들’을 살펴볼까 한다. 영화 역사를 포함한 서양 역사 공부도 겸해서 말이다.    

‘작은 아씨들’(감독 그레타 거윅, 2019) 스틸컷.
 
첫 영화는 1917년 나왔다. 원작 소설 출판 당시에는 영화가 존재하지 않았으니, 리메이크의 역사가 곧바로 시작되진 못했다. 1890년대 중반 영화가 탄생했지만, 단지 일상을 기록한 1분가량의 짧은 동영상에 불과했다. 이후 영화는 점차 스토리를 담기 시작하고, 길이도 길어지는데, 1910년대를 거치면서 2시간 안팎의 러닝타임이 대세가 된다. 딱 그 시기부터 ‘작은 아씨들’의 영화 리메이크 역사가 시작된 셈이다.  

1917년 영화 ‘작은 아씨들’(감독 알렉산더 버틀러)은 영국에서 제작됐다. 흑백의 무성영화였고, 한 시간이 조금 안 되는 길이었다. 다음 해에는 미국에서도 제작됐다. 1918년 ‘작은 아씨들’(감독 할리 놀스)도 역시 흑백의 무성영화였고, 한 시간을 겨우 채운 길이었다. 미국 내 배급은 1912년 설립된 파라마운트가 했다. 파라마운트 영화사는 인수와 합병을 거치긴 했지만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회사다. 요즘도 스크린독과점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1948년 미국 대법원이 5개 메이저 영화사들이 영화관까지 소유하는 것은 불법이라 판결한 ‘파라마운트 판결’의 그 거론되는데, 그 회사가 아직 신생일 때 제작한 영화였다.   

1917년, 1918년 영화의 국내 개봉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 시기라면 국내에서 아직 영화가 제작되지는 못하던 시기였으나, 외국영화들이 일본을 통해 배급돼 상영되던 시기였다. 최초의 한국영화 ‘의리적 구토’(감독 김도산)는 1919년에 제작, 개봉됐다.   

‘작은 아씨들’(감독 조지 쿠거, 1933)
 
세 번째 ‘작은 아씨들’(감독 조지 쿠거)은 1933년 미국에서 제작됐다. 여전히 흑백영화였지만, 유성영화였다. 1927년 세계 최초 장편 유성영화가 제작된 이후, 1930년대를 거처 유성영화는 대세가 되는데 딱 그 시기다. 캐서린 햅번, 조안 베넷 등이 출연했는데, 캐서린 햅번은 데뷔한 지 갓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신인배우였다. 제작사는 RKO로 당시 5개 메이저 영화사에 포함되는 잘 나가는 회사였다. 자막에 이름이 오르진 않았지만, 데이비드 셀즈닉이 제작 과정에 참여했다고 한다. 셀즈닉은 이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감독 빅터 플레밍, 1939)를 제작한 인물이다. 

1933년 ‘작은 아씨들’은 흥행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 당시 대공황 즉 경제위기를 겪고 있던 대중에게 착한 영화로 통했다고 한다. 당시 대중은 영화 속 가족이 가난하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에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국내 개봉 기록을 찾지는 못했는데, 일제강점기로서 전쟁을 준비하던 일제가 검열도 강화하고, 점차 외국영화 수입을 통제하던 시기였다.  

‘작은 아씨들’(감독 마빈 르로이, 1949)
 
네 번째 ‘작은 아씨들’(감독 마빈 르로이)은 1949년 제작됐다. 드디어 컬러영화로 제작됐는데, 아직은 컬러영화가 비중이 높던 시절은 아니었지만, 1935년부터 약 20년 동안 대세가 된 테크니컬러 기술이 사용됐다. 이번에도 미국 대형 영화사인 MGM이 제작했다. 르로이 감독은 ‘애수’(1940), ‘마음의 행로’(1942) 등 유명 멜로드라마들을 연출한 감독이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자넷 리, 준 앨리슨 등이 출연했는데, 당시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성인 연기자로 변신하는 과도기에 있었다. 이 영화에서 연기한 에밀리 역이 마지막 아역인 셈이었다. 대표작 ‘젊은이의 양지’(감독 조지 스티븐스, 1951), ‘자이언트’(감독 조지 스티븐스, 1956) 등에는 아직 출연하기 전이었다. 

1949년이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영화에서 조는 여성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들의 상황을 조국을 위해 입대할 수 없음을 아쉬워하는 식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푸른 화원’이란 제목으로 국내에서 개봉한 ‘작은 아씨들’(감독 마빈 르로이, 1949) 신문광고.
 
다행히 르로이 감독의 작품은 국내 개봉 기록을 찾았다. 그런데 조금 애를 먹었다. 영화 제목이 ‘푸른 화원’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1년쯤 지나 1954년 10월에 단성사에서 개봉됐다. 당시 포스터를 보면 ‘불이무역 배급’이라 쓰여 있는데, 불이무역은 영화도 수입하던 회사로, 1953년엔 단성사를 인수했다. 말하자면 영화를 수입한 회사에서 자신들의 영화관에서 개봉했으니, 수입-배급-상영이 수직계열에 의한 개봉이었다. 

1917년부터 32년이 흐른 1949년까지 영화 ‘작은 아씨들’은 흑백에서 컬러로, 무성에서 유성으로 변화됐다. 경제위기에 위로가 되기도 했고, 전쟁 이후 상황이 좀 반영되기도 했다.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였지만 아직 여성 감독은 등장하지 않았다. 남은 영화들과 좀 더 다양한 이야기들은 다음 칼럼에서 이어서 다뤄보겠다.  

송영애 서일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 

*해당 기사는 외부필진의 칼럼으로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