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어보 | '정약용' 대신 '정약전'..영리한 선택 빛났다

2021. 4. 8. 09:3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무비클릭]
드라마/ 이준익 감독/ 126분/ 12세 관람가/ 3월 31일 개봉
마치 하얀 도화지에 먹으로 칠한 사람들이 움직이는 듯, 담담하고 먹먹한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 해가 빛나는 하늘은 하얗고 그 아래 먹의 농담이 춤을 춘다. 이준익 감독이 흑백으로 연출한 두 번째 영화 ‘자산어보’가 주는 인상이다.

이준익 감독은 ‘왕의 남자’ ‘사도’ ‘동주’ ‘박열’ 같은 작품을 선보인 충무로의 대표적인 사극 감독이다. 시대를 다루는 그만의 문법과 접근 방식이 뚜렷한 편이다. 역사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남아 있는 사료 속 행간을 읽어내는 능력을 갖췄다. 실존 인물과 역사적 사건을 존중하고 고증에 정성과 진심을 쏟는 그의 태도는, 최근 역사 왜곡 논란에 휘말리는 다른 드라마나 영화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자산어보’ 개봉 소식을 처음 접하는 순간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준익 감독은 흥행에 정녕 관심이 없단 말인가’ 생각이 절로 든다. 영화 주인공으로 그 유명한 다산 정약용이 아닌 그의 형 정약전이라는, 다소 생소한 인물을 내세웠고 영화도 흑백으로 만들었다. 정약전의 책 ‘자산어보’ 역시 ‘목민심서’만큼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어느 하나 쉬운 선택이 아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이런 의구심이 모두 해소된다. 흑백으로 그린 조선 시대 모습은 완전히 새롭게 다가온다. 마치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것 같은 부드럽고 포근한 화면의 움직임이 반갑게 느껴진다.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유배되는 정약용(류승룡 분)과 정약전(설경구 분). 정약전은 그곳에서 물질을 하는 청년 창대(변요한 분)를 만난다. 글공부에 뜻이 있으나 이루지 못했고 고기잡이로 연명하는 창대에게 약전은 글을 알려주는 대가로 바다 생물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달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자산어보’가 시작된다.

영화가 그리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지식인 정약전의 모습과 신분의 차이를 넘어 진정한 우정을 나누는 그의 제자 창대의 이야기다. 정약전은 마치 현대의 이준익 감독을 투영한 듯, 조선 시대를 넘어서는 이야기를 토해낸다. 신분제를 비판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그러나 그 뜻을 펼 기회가 없기에 백성의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을 펴고자 한다. 스승과 제자이면서 동시에 친구기도 했던 약전과 창대의 삶이 어떻게 엇갈리는지 영화는 조명한다.

신분이 사라진 세상을 꿈꾼 파격적인 선비이자 ‘죄인’을 스승으로 삼아 글을 배운 창대. 그리고 스승으로서 창대의 이야기를 참고로 써내려간 ‘자산어보’의 숨겨진 가치를 끄집어낸 감독의 의도를 읽어볼 수 있는 좋은 영화다.

다만 후반 진행이 다소 밋밋해 긴장감을 조성하지 못한 점은 살짝 아쉽다. 담담한 역사적 사실에 극적 요소를 삽입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라이너 유튜버 유튜브 채널 ‘라이너의 컬쳐쇼크’ 운영]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03호 (2021.04.07~2021.04.13일자)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매경이코노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