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시신을 욕조에 감춰야 했던 열아홉.. 그의 속사정

조영준 2021. 5. 5.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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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링 무비 207]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열아홉>

[조영준 기자]

 전주국제영화제 타이틀
ⓒ 전주국제영화제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스무 살이 되면 집을 떠나야지.
하고 처음 생각한 건 중학생 때였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목을 조르려고 했으니까.

병든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열아홉, 고3 여고생 소정(손영주 분)은 독립을 하는 것이 소원이다. 오랜 시간 폭언과 폭행을 일삼던 아버지가 집을 떠나고 그 후유증으로 몸과 마음을 다친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늘 술에 취해 정신도 멀쩡하지 않고, 발작이라도 일어나면 호흡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엄마는 하루 빨리 병원에 입원하는 편이 나아 보이지만, 아직까지는 집을 방문하는 요양사의 도움을 받고 있다. 그마저도 매일 늦게 오는 바람에 학교까지 지각하기 일쑤. 소정은 여러 가지로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런 소정을 버티게 해주는 것은 음악이다. 집에서도 밖에서도 MP3로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낸다. 가끔 자신의 현실을 모티브로 하는 노래 가사도 쓰곤 하는데, 지금 소정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유이기도 하다. 하루 빨리 집을 떠나고 싶은 것은 중학교 때부터 계속된 나쁜 기억이 이 집 전체에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금 더 쾌적하고 좋은 환경에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쏟아내고 싶은 마음도 크다.

그 날도 그런 평범한 날들 중에 하루였다. 일어나자마자 엄마가 발작을 일으켜 호흡을 힘들어했고, 집에 오기로 했던 요양사가 오지 않아 곧 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먼저 학교를 향했다. 직업 실습과 관련된 건으로 선생님과 상담을 했고, 돌아오는 길에는 옆집에 사는 할머니와 약간의 실랑이가 있기는 했지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와 엄마를 부르는 것까지는 평소와 똑같았다. 엄마가 지내던 방으로부터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고, 엄마가 싸늘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 있었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열아홉> 스틸컷
ⓒ 전주국제영화제
02.
우경희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영화 <열아홉>은 갑작스런 엄마의 죽음으로 예상치 못한 자유를 얻게 된 열아홉 소녀 소정에 대한 이야기를 그려낸 작품이다. 지긋지긋한 집을 떠나 자유를 얻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자유를 얻게 된 소녀. 영화는 상상으로만 꿈꿔왔던 혼자의 삶이 막상 현실이 되고 나니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며 변해가는 소정의 감정을 그려낸다.

엄마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도 잠시, 소정에게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세대주가 세상을 떠나게 될 경우 지금 살고 있는 임대 아파트에서 쫓겨날 지도 모른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 언젠가 옆집 할머니도 비슷한 문제를 겪었던 일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그렇다고 해서 주변에 자신을 적극적으로 도와 줄 어른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빠의 연락처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쪽에 연락할 엄두는 조금도 나질 않고, 가까이 살고 있는 삼촌은 도와주기를 꺼려하는 눈치다. 부모의 사정으로 집을 떠나고 싶어했던 소정인데, 막상 부모가 모두 곁을 떠나고 나자 이 집을 떠날 수가 없게 된 상황이랄까. 빨리 돈을 구해서 새로운 대안(집)을 찾을 때까지는 엄마의 죽음도 모른 척 할 수밖에 없게 된다.

03.
열아홉 소녀 소정의 버티기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일단 엄마를 화장실 욕조에 숨겨두는 것이 첫 번째. 그 비밀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지금 일하고 있는 아이스크림 공장에서 드라이아이스를 훔쳐 오기도 하고, 엄마의 사정을 봐주던 복지 센터에는 등록해 두었던 장기 요양 입원 신청의 철회도 요구한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고, 아무도 도와주려고 하지 않는 상황이지만 나름대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하는 소정. 다만, 처음부터 잘못된 그녀의 결정은 모든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기 시작한다.

역시 문제가 만만하지는 않다. 마침 주기적으로 실시되는 임대 아파트의 실질 거주자 확인 기간이 되어 직원들이 집을 방문해 호구 조사를 시작한다. 센터에서는 엄마가 받아오던 급여 문제로 정기적인 병원 방문 기록이 있어야 한다고 알려오지만, 당사자가 병원을 직접 방문하지 않으면 이조차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된다. 공장에서 같이 일하는 아줌마들은 불편한 관심을 계속해서 보여오고, 자신의 문제로도 복잡한 와중에 옆집 할머니는 도움을 요청해 온다. 상황이 이쯤 되면, 최저임금도 주지 않으려고 하는 공장장 아들의 태도는 걱정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열아홉> 스틸컷
ⓒ 전주국제영화제
04.
소정이 성현(정태성 분)을 만나게 되는 것은 그 즈음이다. 성현의 작업물이 담긴 MP3 player를 소정이 줍게 되고 같은 공장에서 일하게 되면서 말문을 트게 되지만, 두 사람의 첫만남은 삐걱거리는 느낌이다. 두 사람을 가깝게 만드는 매개는 역시 음악이다. 제대로 배워본 적은 없지만 음악을 좋아하고 또 하고 싶어하는 소정에게 이미 자신의 음악을 만들어 가고 있는 성현은 가까이 하고 싶은 존재다. 음악에 관심을 갖는 소정이 성현도 그리 나쁘지 않은 모양. 성현은 소정에게 음악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알려주고, 소정은 자신이 쓴 가사를 보여주며 음악에 대한 마음과 서로에 대한 관계가 조금씩 나아가기 시작한다.

환경적으로 두 사람이 비슷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도 친밀감이 높아지는 데 한몫을 한다. 소정이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성현은 지금 부모의 불화로 집을 떠나고 싶어한다. 직접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며 중고 거래 사기에 가담하면서까지 돈을 모으고 싶어하는 이유도 그 역시 하루 빨리 집을 떠나고 싶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며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된다. 교우 관계가 별로 좋지 못했던 소정의 안부를 걱정하는 성현을 다른 친구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다. 사이가 나쁘기는 하지만 아직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모가 함께인 성현과 달리 소정은 완전히 혼자라는 것. 그리고 모든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성현과는 다르게 절대로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소정에게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엄마에 대한 이야기.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막막한 상황에 놓여 있기는 했으나 처음부터 잘못된 선택을 했던 결과가 지금, 그 누구도 자신의 곁을 내어줄 수 없는 상황을 만들게 되어버리고 한 것이다. 소정의 곁으로 더 가까이 오려는 성현에게 이제 와 진실을 말할 수도 없고, 그 마음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상황이다.

05.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의 작품 중에는 어른들의 사정에 의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는 청소년들의 모습이 담긴 영화가 몇 편 있었다. 부정한 어른들에 의해 꿈이 산산조각 난 야구 유망주의 이야기를 그린 <낫아웃>이 그랬고, 나쁜 어른들 때문에 잘못된 길로 빠져들게 되는 아이들의 이야기 <파이널 라운드>가 그랬다. 이 작품 <열아홉>도 크게 다르지 않다. 소정은 분명히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그건 아직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소정만의 잘못은 아니다. 주변 어른들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기대하지 못하고 홀로 삶의 무게를 짊어져야 했던 소녀의 선택. 이 문제가 과연 비난만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일까?

무거운 현실과 잘못된 거짓으로 인한 중첩되는 문제 앞에 소정은 많은 것들을 조금씩 놓아가기 시작한다. 돈을 벌어 좋은 집에 혼자 나가 살겠다는 꿈. 음악을 만들면서 자유롭게 살겠다는 꿈. 이런 꿈들은 문자 그대로 닿을 수 없는 거리의 '꿈'이 되고 만 것이다.

잘못된 행동이 세상에 드러나고 난 뒤에 걱정하지 말라며 대신 다 해결해 주겠다고 말하던 성현의 아버지가 떠오른다. 밤마다 아내와 싸우며 집안의 불화를 일으켜 아들을 불안하게 했던 사람이지만, 적어도 그런 사람 하나라도 소정의 곁에 있었더라면 그녀의 삶은 훨씬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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