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이후 7년.. 아직 수면 위로 돌아오지 못한 이들

김상목 2021. 11. 23.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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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로그북>

[김상목 기자]

 영화 <로그북> 포스터
ⓒ 시네마뉴원
 
전두환이 죽었다. 그가 쿠데타를 일으킨 후 권력을 쥐기 위한 밑 작업으로 주요 언론은 '용비어천가'를 낯 뜨겁게 헌상해 바쳤던 부끄러운 과거가 있다. 그 당시 한국일보 기자였던 작가 김훈은 3회에 걸쳐 그 특집을 작성했다. 훗날 대담에서 그는 누군가는 어차피 해야 하니 자신이 '총대를 멘' 결과라고 냉소적으로 답했다고 한다.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 같은 작업으로 큰 명성을 얻었지만 기자 시절 그의 보수적이고 허무주의적 언행으로 여러 차례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었다.

그랬던 김훈이 요즘에는 사회참여에 나선다. 근래에는 산업재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며 중대재해기업처벌법 개정 등에 발 벗고 나선다. 그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던 이들에겐 사뭇 놀라운 변화다. 무엇이 그의 뿌리 깊은 냉소와 위악의 얼음덩이를 녹여냈을까? 많은 이들은 2014년 4월 16일을 그 결정적 전환점으로 꼽는다. 개인적으로도 2010년대 이후 김훈 필력의 최고봉은 그가 해당 사회적 참사에 대해 언론에 기고한 몇 개의 칼럼들이라 생각하고 있다.

김훈의 칼럼들에서 공통적으로 견지되는 논지가 있다. 이건 그저 개별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해방 이후 우리가 악착같이 잘 살아보겠다고 국가 주도 하에 이를 악물고 달려온 끝에 물질적으로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공동체는 무너지고 윤리는 실종된 가운데 황금만능주의와 편법이 팽배해 이제는 사회 전체가 무너지고 침몰해가는 지경이라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그런 한국 사회의 붕괴를 말 그대로 상징하는 사건이기에, 불가항력에 의해 벌어진 재수가 없는 소수의 희생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견해다.

그렇게 사회적 참사가 일어났거늘, 이미 무너진 사회 시스템은 수습과정조차 온전히 해낼 리 없었다. '대통령의 7시간'은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다도 우리가 권력을 위임한 정부가 얼마나 총체적으로 무능한데다 부도덕한지를 증명하는 끔찍한 예시로 남았다. 살릴 수 있었던 이들을 구해내지 못한 건 그만큼 우리 사회에 축적된 적폐가 거대했기에 상식이라 믿었던 것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한국사회의 이후 몇 년간의 거대한 분열은 여전히 우리 사회가 제대로 반성하거나 참회하지 않은 채 표류하고 있음을 부끄럽게도 다시 한 번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어디에도 '착한 사마리아인'은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들이 안간힘을 쓰며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는 덕분에 다행히도 우리는 야만의 정글로 강제 이동되진 않은 채 반성할 마지막 기회를 얻는다. 세월호 참사 당시에도 그런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의 헌신과 가치에 대해 우리는 아직 온당히 평가하고 인정하지 못한 게 적지 않다.

세월호 잠수사들의 일기
 
 영화 <로그북> 스틸 이미지
ⓒ 시네마뉴원
 
'또' 한편의 세월호 관련 영화가 개봉한다. 독립 PD로 잔뼈가 굵은 복진오 감독의 <로그북>이다. 영화가 완성되어 영화제들에서 선보인 지 3년만의 일이다. 편집버전인 <로그북 - 세월호 잠수사들의 일기>는 2018년 4월 23일, "MBC 다큐 스페셜" 774회 편으로 방영된 바 있으니 개봉이 퍽이나 많이 늦은 셈이다.

'로그북', 다이버들이 잠수에서 돌아온 후 날짜, 장소, 수심, 수온, 특기사항 등을 정리한 기록이다. 2014년 4월 16일 사고 발생 후 7월 10일까지 70여 일간 전국에서 달려와 희생자 수습과정에 참여했던 민간 다이버들이 하루하루 써내려간 일지의 내용을 기반으로 이 영화는 만들어졌다. 복진오 감독은 세월호 침몰 사고가 발생하자 동료 PD들과 함께 기록 작업을 위해 현장으로 향했다고 한다. 마침 수중촬영 작업을 위해 취득한 다이버 자격증이 있던 감독은 그 이점을 살려 민간 다이버들과 함께 3개월간 현장에 머물며 기록촬영을 진행했다.

하지만 당시 현장의 급박한 상황 때문에 로그북을 다이버들이 제대로 기록했을 것이라고는 감독도 예상치 못했다고 한다. 나중에야 로그북의 존재를 확인하고 감독은 다른 이들이 접근하기 힘들었던 해당 소재를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편집에 들어가게 된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로그북> 해당 영화를 보고 나면 저절로 떠오를 법한 문장이다. 이 영화는 내/외적 측면에서 첨예한 쟁점들을 다수 내포하고 있다. 민감한 이슈들이 적지 않았기에 감독은 작업을 진행하면서도 혹여나 선의의 피해자나 불필요한 논란이 생기지 않을까 무척 조심했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런 감독의 섬세한 배려와 고심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에 담긴 쟁점들은 언젠가는 짚고 넘어가야 할, 우리가 세월호 참사를 논할 때 그저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흘려보낼 순 없는 성격의 것들이다.

작품을 둘러싼 외부적 조건부터 따져보자. <로그북>에 담긴 이야기는 당시 정권이 교체되고 난 뒤에야 비로소 공개가 가능했다. 그리고 (공개가 가능했던 상황이 파생한) 또 다른 국면변화에 얽힌 사연이 있다. 재차 부연설명하자면, 영화가 담은 내용을 불편해 하는 것을 넘어 암묵적으로 공개 자체를 훼방 놓던 시기가 엄연히 존재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족쇄가 풀리게 되자마자 영화가 담은 내용에 관한 사회적 관심과 주목은 썰물 빠지듯 사라져갔다. 기이한 양가성이다.

외부적 요인의 전반부는 물론 당시 정권의 수준에서 비롯된 문제다. 정권에 비판적인 문화예술계 인사와 단체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블랙리스트 파문을 일으켰던 매카시즘 색안경의 전형에 속하는 사례다. 그래서 <로그북>의 TV 버전은 완성된 후 한참동안 방영할 방송사를 잡지 못해 상당기간 공개가 지연되었다. 2017년 5월 대선이 지나고 나서야 지상파 방송에서 해당 작품을 소개할 여건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늦었지만 다행인 셈이다.

하지만 정작 정권이 교체되고 난 뒤부터 기묘한 현상이 일어났다. 비정규직이나 사드(THHAD) 문제처럼 민감한 정치사회적 쟁점을 담고 있거나 세월호 참사처럼 사회적 참사 트라우마를 소재로 다룬 작업들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급격히 사라져 버렸다. 적폐를 일삼던 정권을 향한 분노와 회의가 팽배하던 시절에는 (개봉관을 잡지 못하거나 정상적인 지원 체계에서 배제되는 불이익을 당한 대신) 세상의 관심과 지명도를 관련 작품들은 획득할 수 있었다. 용산 참사를 저연으로 다룬 <두 개의 문> 같은 작업은 그렇게 성취를 이뤘다. 하지만 정권 교체 이후에는 그동안 열심히 싸우느라 지쳐버린 대중들에게서 '이제 그만'이라는 형태로 외면을 당해버린 셈이다. 어쩔 도리 없는 상황이지만 퍽 야속한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 팬데믹과 우리 사회 빈부격차의 심화로 인해 사회적으로 체감되는 '불황'의 일상화 역시 장애물로 작용하는 중이다. 영화의 경우 불황기에는 현실의 고단함을 달래는 코미디나 판타지 부류가 인기를 얻어왔음은 영화의 역사 초반부터 증명된 사례이기도 하다. 현실을 견디기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대중은 극장에서까지 그 체험을 연장하기를 본능적으로 내켜하지 않는다. <로그북>은 그런 조건에 처한 다른 숱한 가치 있는 사회적 작업들과 한데 묶일 운명인 셈이다.

<다이빙벨> 넘어서기
 
 영화 <로그북> 스틸 이미지
ⓒ 시네마뉴원
 

내부적으로 따져볼 측면은 좀 더 논쟁적인 부분이다. 적지 않은 영화가 세월호 참사 관련 소재와 배경을 담아 이미 우리 앞에 선보인 바 있다. 참사를 둘러싼 사회적 논쟁에 신속하게 개입하고자 만들어졌던 <다이빙벨>(2014)와 <나쁜 나라>(2015)부터 극영화에 슬픔과 애도를 담아낸 <생일>(2019),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라 화제가 되기도 했던 <부재의 기억>(2018), 참사 생존자와 유가족, 조력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당신의 사월>(2019)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업이 등장했다. 그 작업들 대부분은 작가적 욕망이나 상업적 성공보다는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담지하려 했다.

다수의 작업은 지금 현재도, 그리고 이후로도 상당기간 동안 여전히 그런 사회적 역할을 유지할만한 가치와 자료로서의 효용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결과물은 이제 그 역사적 시효를 다했거나, 혹은 이후 확인된 정보들에 의해 그 유효수명이 다한 경우도 발생했다. 가장 먼저 관련 사안을 영화화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던 <다이빙벨>의 경우 또한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사례에 해당된다고 보는 편이다. 물론 해당 작품은 충분히 사회적으로 역할을 당시에 해낸 편이다. 그럼에도 (명백히 당시 정권의 정보통제와 히스테릭한 탄압에 일차적으로 기인하긴 했지만) 후속으로 다양한 결의 작업들이 등장한 현재에 굳이 이 영화를 다시 볼 필요가 크게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 특정시기에 필요한 몫을 한 뒤 퇴장하면 될 일인 것이다.

아쉬움을 넘어 문제의식을 느끼는 건 이후 등장한, <다이빙벨>의 부정적 측면만 확대 계승한 것처럼 보이는 일군의 작품들의 존재다. 해당 작품들은 확증편향과 검증되지 않은 가설, 음모이론 등이 혼재된 가운데 우리가 몰랐던 '충격적 진실'이 마침내 밝혀졌다는 식의 공통된 홍보로 다가왔다. 하지만 세상을 뒤흔들 충격적 정보는 객관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희생제물' 같은 선정적인 주장이나 전문가들에 의해 여러 차례 부정된 '잠수함 충돌설'과 '에어포켓 설'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사실을 은폐하고 자신들의 무능에 대한 비판을 막으려던 당시 정권의 탓이 일차적이지만 그럼에도 어느 선을 넘어서기 시작하면서 혼란과 피로감을 준 것도 사실이다.

특히 아쉬운 점은 여러 측면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성실히 윤리적으로 작업한 소중한 결실들이 오히려 대중들에게 외면 받거나 온당하게 주목받지 못한 측면이다. 다각도로 검증하고 우리가 놓치고 있던 지점을 알리려 했던 그런 가치 있는 결과물들이 누려야 할 몫을 함량미달의 위와 같은 부류가 잠식해버렸다. 그런 경우가 결코 적지 않다. 그리고 이 영화, <로그북>은 내용적으로나 주목받을 타이밍 상으로나 그런 아쉬움을 남기는 전형적인 작품이다.

우리는 과연 그들을 책임지려 했는가?

다시 영화로 돌아간다. 세월호 참사에 관심을 갖고 지켜봐온 이들이라면, <로그북>에 담긴 내용이 아주 낯설 리가 없다. 구조작업 중 사고로 돌아가신 분도, 마음의 상처로 세상을 떠난 분도 계시다. 구설이 많았고 상처도 많았다는 이야기는 당시에도 어렵지 않게 들려왔었다. 할 말이 참 많을 텐데, 영화 속 민간 다이버들은 담담하다. 그들은 고락을 함께한 동료를 떠나보냈고, 작업에 참여한 이들 중 상당수가 지금까지도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사고 이전의 삶으로 온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사회적 명예회복이나 경제적 보상이 빈약하기 짝이 없었음은 조금만 찾아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언론은, 그리고 여론은 속성상 어쩔 수 없이 '최대의 비극성'을 찾게 마련이다. 그 가운데 부당하게 공격당하기도 했던 다이버들은 늘 뒷전으로 밀려나왔다. 영화 속에서 이들은 조심스러워하며 말을 아끼다가도 몇 년 동안 가슴에 담아뒀던 회한을 끄집어내기 시작한다. 그 순간은 정말 그들이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로 남은 '그날 바다'의 검푸른 물밑을 보는 느낌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다이버들은 내내 표현을 조심하며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그들은 꾹꾹 참다가 최소한도로만 속내를 표현한다. 하지만 지극히 줄여서 드러내는 상황일지언정 우리는 벌써 7년 전 당시 구조현장에서 벌어졌던 기막힌 사정을 재확인할 수 있다. 어처구니없는 억측과 부풀려짐에 의해 쏟아지던 오해와 매도에 다이버들은 '우리가 왜 이래야 하나?' 하고 분개하면서도 유가족들의 간절함을 떠올리며 분을 참고 작업에 임해왔음이 영화 속에서 생생하게 재현된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쫓겨나다시피' 나오게 될 때까지 이들은 한 번도 제대로 갖춰진 지원을 받거나 안전한 조건을 보장받지 못했다. 그리고 작업을 중단한 이후에도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부실 보상과 사회적 외면에 직면한다.

영화는 이 모든 구구절절한 사연을 지독히도 간략하게 언급된다. 할 말은 잔뜩 있지만 그래도 희생자와 유가족들의 상처를 더 염려하는 양식을 다이버들은 잃지 않았고, 영화를 작업한 감독 역시 간과하지 않는다. 그런 역지사지 태도가 돋보이지만 그럼에도 당시에 논란을 불러왔던 특정 부분들은 관련 쟁점을 다룬 타 작품들과 자연스럽게 교차 검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영화는 논쟁을 벌이기보단 우리도 입장이 있다고 하소연하는 차원에서 그치지만.

헌신과 인내의 태도
 
 영화 <로그북> 스틸 이미지
ⓒ 시네마뉴원
 
<로그북>은 끝까지 내내 그동안 억누른 채 참아왔을 그들의 명예회복 요구를 내세우지 않는다. 본 작품의 기본적 태도는 조심스럽게 '우리들은 이런 일을 겪었다'고 한참 뒤에야 토로하는 취지에 가깝다. 그 현장에서 힘들지 않았던 이 누가 있으랴. 상처입지 않은 이가 존재할 리 없다. 그러다 보니 서로 자신이 힘들었다고 하소연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그 각자의 목소리가 브레이크 없이 올라가버리기 시작하면 어찌 수습하기가 참 힘들게 마련이다. 요즘 우리 주변에서 흔히 느껴지는 새로운 형태의 차별은 '내가 힘들기 때문에 남 사정은 알고 싶지 않아!'에 가까운 형태를 취한다. 어느새 한국사회는 약자끼리, 혹은 '을'끼리 천하제일 불행대회를 치르는 꼴이 되었다.

하지만 방향타를 제대로 잡으면 고통과 상처를 입은 이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법이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자신들의 한스러운 문제 해결에만 갇히지 않고 사회적 연대로 헌신한 덕분에 부도덕하고 무능했던 당시 정권에 대한 탄핵이 나비효과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래서 이 영화 속에 등장한 다이버들의 태도가 더욱 돋보인다. 그들은 1일 1회가 표준인 잠수를 4회까지 무리하게 단행하면서 열악한 작업 조건 때문에 건강에 위협이 될 걸 알면서도 제대로 된 감압 과정조차 보장받지 못했다. 여론에 쫓기던 당시 정부는 수습 실적이 저하되자 현장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팔랑귀가 되어 검증되지 않은 조치를 땜질하듯 무리하게 즉흥적으로 시도해 더 큰 혼선을 준 것도 모자라 훗날 자신들의 실정을 덮기 위한 방패막이로 다이버들을 희생시키기까지 했다.

영화는 조심스럽게 유가족과 다이버들의 갈등도 다룬다. 하지만 누가 옳은지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함은 아니다. 우리들의 어긋난 기억을 환기하기 위한 최소한의 수정에 가까운 접근이다. 인터뷰 하나, 현장기록영상 하나마다 그렇게 조심스러운 태도가 아른거린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진심을 뒤늦게 확인하며 더 미안함을 느끼게 하는 측면으로 다가오는 지점이기도 하다.

자력으로 탈출하기 위하여

그렇게 영화는 찬찬히 그들이 참사 현장에서 겪었던 70여 일의 시간들을 로그북에 의지해 다시금 우리 앞에 재현한다. 이것만으로도 <로그북>의 사료적 가치는 가볍지 않다. 하지만 영화는 이 정도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랬다면 굳이 늦깎이 개봉을 강행하려할 필요도 없이 아카이브에 보관되면 족할 테니까. 이 영화의 추가적 가치는 로그북이 끝난 이후부터 시작된다. 이제 영화는 그들이 잠수했다 아직도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4.16에 대해 되짚기 시작한다.

물론 로그북을 통해 생생하게 재구성된 현장기록은 이 영화의 기본 골격을 이루고, 7년이 지난 현재에 과거를 복기하는데 매우 유용한 기능을 하지만 작품이 현재적 가치를 가지게 하는 강점은 철수 이후 그들이 입은 PTSD의 현주소, 그리고 극복과 치유를 위한 노력의 순간들이 공개되는 순간들이다. 이 찰나들은 차곡차곡 쌓여가면서 두터운 지층을 이어나간다. 그 이야기들은 무척 가슴을 저미게 만든다.

영화에 등장한 다이버들 상당수는 다시 평범하게 그들이 누렸던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누군가는 정신적 후유증으로 술을 입에 대지 않고는 잠을 못 이루고 폭력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변해버린 상황을 토로한다. 다른 이는 한국이 싫어서 해외를 떠돌며 삶을 이어간다고 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건강을 해쳐 더 이상 잠수를 하지 못하고 대리운전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중이다. 영화에선 언급되지 않지만 부당하게 소송을 당하고 오랜 법정싸움 끝에 만신창이가 된 이도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죽음 각인'의 트라우마에 처해 있음이 정신과 상담을 통해 밝혀진다. 그들 혼의 일부는 자신들이 다짐했지만 끝내 완수하지 못한 미수습자들의 유해와 함께 그 바다 속에 갇혀버린 셈이었던 것이다. 이제 다이버들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각자의 싸움을 거듭하게 된다. 그 과정 또한 지독히 담담하게 묘사된다.

<로그북>을 감싸는 일관된 태도는 분노와 항의에서 성찰로 향한다. 세월호 참사를 우리 사회가 온전히 계승하고 받아 안기 위한 미래 방향 좌표와 부합되는 접근방법이다. 영화는 간절하게도 우리가 잊고 있거나 간과했던, 한 인간으로서 측은지심을 가진 개별적 주체인 다이버들에 대해 이것만은 알아달라고 호소한다. 그들은 자신들 또한 죽음의 위협 속에서 유가족들도 상상하지 못했던 참사 당시의 상황이 각인된 희생자 수습과정에 임했다. 그 장면, 그 광경이 뇌리에서 잊힐 리 없다. 인터뷰 내내 그들은 자신의 자녀, 자신들의 가족이 그랬다면 하며 복기를 거듭한다. 그리고 시신을 발견하던 순간의 감정과 애타게 그들을 기다리던 유가족들에 대한 책임감을 떠올린다. 우리가 왜 그들을 오해했는지 스스로 부끄러워지는 순간들이다.

반가운 순간도 있다. 그 겨울, 광화문 광장 어딘가에서 그들 또한 촛불을 들고 함께했던 사실을 이제야 확인하는 순간은 당연히 감격스럽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데 말이다. 그리고 오랜만에 유가족들과 재회하는 현장은 깊은 슬픔을 공유하는 이들만이 나눌 수 있는 교감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고통과 기억의 연대'가 적어도 저 영화 속 시공간에서 함께 있던 이들 사이에선 맺어지고 있구나 하는 작은 희망의 불씨 같은 체험이다.

독립 다큐멘터리의 가치 또한 인정되길
 
 영화 <로그북> 스틸 이미지
ⓒ 시네마뉴원
 
<로그북>을 소화하기 위한 100분의 시간은 물리적으로보다는 정서적으로 견디기 만만찮은 지난한 난관이다. '정신 줄 놓는다'는 표현은 도저히 제 정신으로 견뎌내기 힘든 고통의 순간에 마지막 보호 장치로 정신을 놓아버린다는 의미다. 기억해야 하지만 요즘 우리가 처한 일상 현실의 거칠고 차가움 또한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런 세상 분위기에서 이렇게 성실한 태도로 마음 아픈 이야기를 꾹꾹 눌러 담은 작업은 오히려 푸대접받기 일쑤다. 이게 근래 한국 독립영화가 겪는 또 다른 딜레마이다.

쉽게 해결되지 않는 난제를 겪을 때 다수는 현실을 외면하거나 회피하려는 태도를 취하곤 한다. 물론 그렇다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진 않는다. 하지만 당장 해결할 수 없다고 절망하면 누군가에게 총대를 메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럴 때 '사실은 00가 문제다'라고 책임을 떠넘길 누군가를 만드는 건 위험한 도박이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는 광야에서 외면을 받으면서도 촛불을 들고 올바른 방향으로 다른 이들을 인도하려 애쓴다. 하지만 그들의 노고가 제대로 대접받기란 드문 경우다. '예언자'는 환영받기 보다는 오해와 경계, 혹은 무시당하는 존재다.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내용을 어렵게 작업한 상당수의 독립영화들은 현대판 예언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동일하게 외면당하곤 한다.

아마 이 작품도 그 정해진 운명을 벗어나긴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비록 눈에 확 띄게 근사하게 가공되고 타이밍 맞게 조명을 받아 빛나지 않을지언정, 원석 상태라도 보석은 짝퉁 유리장식품과 다르게 마련이다. 본 작품의 가치는 언젠가 꼭 온당한 평가를 얻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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