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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던 한국영화 첫 '월드스타'.. 강수연, 40여편 영화 남기고 떠나다

박준호 기자 입력 2022. 05. 07. 19:05 수정 2022. 05. 07.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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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뇌출혈로 쓰러진 지 사흘만에 세상 떠나
네살 때 아역배우로 시작해 '고교생일기' 스타덤 올라
'씨받이', 베니스영화제서 동아시아 최초 여우주연상
'그대 안의 블루' 등에선 페미니즘적 여성상 연기하기도
BIFF 집행위원장 등 한국영화 어려울 땐 팔 걷어붙여
배우 강수연이 향년 55세로 7일 별세했다. 사진은 그의 마지막 공식석상이 된 지난해 10월 22일 제3회 강릉국제영화제 개막식 레드카펫 행사의 모습. 연합뉴스
[서울경제]

한국영화를 처음 국제무대에 알린 주역인 ‘월드스타’ 배우 강수연이 7일 별세했다. 대중엔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정난정 역할로 유명하지만, 강수연을 빼놓고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의 한국영화를 설명하는 건 불가능할 만큼 영화계에서 그의 족적은 크다. 2007년 드라마 ‘문희’ 이후로는 행정가로서 활동이 두드러졌으며, 올해 넷플릭스 영화 ‘정이’로 오랜만에 복귀를 예고했기에 더 큰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이제 그는 동아시아 배우 중 최초로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걸 비롯해 국내외 영화제에서 받은 총 10개의 주연상 수상기록과 40여편의 출연 영화들로 기억되게 됐다.

강수연의 장례위원회 측은 이날 “아름다운 배우 강수연님께서 7일 오후 3시 우리 곁을 떠났다”고 밝혔다. 향년 55세. 그는 앞서 지난 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자택에서 뇌출혈 증세로 쓰러진 후 심정지 상태로 병원으로 후송됐으며, 사흘째 의식불명 상태로 치료를 받아 왔다. 그의 가족들은 수술도 고려했지만, 호전 가능성이 낮다는 의료진의 의견에 따라 이를 포기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에게 ‘월드스타’ 타이틀을 안긴 영화 ‘씨받이’의 한 장면.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 캡처

고인은 1966년 태어나 네 살 때부터 아역배우로 연기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데뷔는 이른바 ‘길거리 캐스팅’이었다. 한 남성이 집 근처에서 놀던 강수연의 작은 얼굴에 올망졸망한 이목구비를 보고는 집이 어디냐고 묻더니 함께 집에 가서 부모님의 허락을 구하면서 데뷔가 성사된 것. 이후 그는 동양방송(TBC) 전속 아역배우로서 다수의 어린이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다. 고등학생 시절 출연한 KBS 드라마 ‘고교생일기’는 그를 함께 출연했던 손창민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하이틴 스타로 올려놓았다. 고교 졸업 후 강수연은 1985년 ‘고래사냥2’로 성인배우로 활동을 시작했고, 1987년 청춘 멜로영화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의 흥행 성공과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의 대종상 여우주연상 수상으로 본격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리고 같은 해 임권택 감독의 영화 ‘씨받이’가 나오는데, 이는 강수연의 연기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된다. 당시로서 파격적 노출장면을 소화했을 뿐 아니라 출산 장면만 4박5일에 걸쳐 찍은 그는 이 영화로 한국은 물론 동아시아 배우 중 최초로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는다. 국내 배우의 칸·베니스·베를린 등 이른바 ‘세계 3대 영화제’ 연기상 수상 기록은 20년 후 전도연이 ‘밀양’으로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기 전까지 강수연이 유일했다. ‘월드스타’란 별명도 여기서 유래했다. 2년 후 임 감독과 다시 뭉친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에서는 비구니 스님을 연기하며 실제 머리를 삭발하는 열정을 보여줬으며,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강수연은 ‘씨받이’와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잇따라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타며 ‘월드스타’란 별명을 얻는다. 사진은 1989년 7월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 참가했던 대표단 귀국 모습. 왼쪽부터 임권택 감독, 강수연, 김동호 당시 영화진흥공사 사장. 연합뉴스

그 다음부터 강수연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89), ‘경마장 가는 길’(1991), ‘베를린 리포트’(1991) 등을 잇따라 성공시키며 한국영화 뉴웨이브의 중심에 선다. 1992년엔 영화 ‘그대 안의 블루’로 2억원의 출연료를 받으며 여성 연예인 중 최초로 억대 출연료 기록을 세운다. 이 영화는 일과 결혼 사이 갈등하는 전문직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영화 중 처음으로 페미니즘 코드를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흥행에도 성공했다. 이 외에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5),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등 페미니즘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로 여성상의 변화를 표출했다. 다만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영화의 세대교체 바람 속에 인기는 전성기에 비해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SBS ‘여인천하’(2001)의 정난정 역할로 오랜만에 TV에 복귀했고, 그 해 SBS 연기대상을 받으며 건재함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 이후 다시 활동이 뜸해져, 2006년 영화 ‘한반도’의 카메오 출연과 2007년 주연을 맡은 MBC ‘문희’ 정도를 제외하면 2000년대 활동이 적다.

SBS ‘여인천하’에 주인공 정난정 역할로 출연한 강수연의 모습. 그는 이 작품으로 건재를 과시한다. 연합뉴스

스크린에서 안 보일 때 그를 볼 수 있던 곳은 영화 행정과 관련된 현장이었다. 강수연은 한국영화계를 누구보다 지지하면서 남성 중심의 영화판을 휘어잡은 여걸로도 이름이 높았다. 애주가가 많은 영화계에서도 대적할 자 없는 주당으로 유명했던 그는 전성기부터 무명 단역배우나 스태프들을 잘 챙겼다. 영화촬영 뒤풀이로 후배들에게 자주 술을 사며 한 말인 “우리 영화인이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말이 유명하다. 류승완 감독은 무명시절 강수연의 이 말을 듣고 멋있다고 생각해서 영화 ‘베테랑’에서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명대사로 써먹기도 했다.

2015년부터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은 것도 한국영화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이른바 ‘다이빙벨 사태’와 부산시의 외압 속에 표류하던 부산국제영화제를 수습하기 위해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과 공동으로 집행위원장을 맡는다. 이미 1996년 출범 초기부터 심사위원,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한 터. 그는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제가 망가지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고, 앞으로 나서달라는 후배들의 간절한 요청이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수년 간 계속된 갈등과 파행에 책임을 지고 2017년 물러났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물러난 후로는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작년 10월 강릉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하며 4년만에 공개 활동을 재개했다.

강수연이 지난 2015년 7월 부산국제영화제(BIFF) 공동 집행위원장에 선임된 후 임시총회가 열린 부산시청 대회의실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강수연은 인터뷰에서 꿈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마다 “연기 잘하는 할머니 여배우가 되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달빛 길어올리기’(2010), 단편 ‘주리’(2013) 이후 출연작이 없던 그는 지난해 연상호 감독의 넷플릭스 영화 ‘정이’에 주연으로 캐스팅돼 9년만의 복귀를 앞두고 있었다. 이미 촬영이 마무리된 후 후반작업 중인 이 작품은 강수연의 유작이 됐다. 할머니 여배우가 되고 싶다던 꿈은 결국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됐다.

한편 강수연의 장례는 김동호 강릉국제영화제 이사장(전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을 장례위원장으로 하는 영화인장(葬)으로 치러진다. 또한 그의 대표작을 만든 임권택 감독, 영화 ‘블랙잭’(1997)에서 함께한 정지영 감독,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로 전성기를 함께 한 배우 박중훈, ‘고래사냥2’ ‘그대 안의 블루’ 등에서 호흡을 맞춘 배우 안성기 등이 장례위 고문을 맡았다. 그 외 배우 김지미·박정자·신영균·손숙, 제작자 정진우·황기성도 이름을 올렸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지하 2층 17호에 차리며, 8일 오전 10시부터 조문을 받는다. 발인은 11일.

박준호 기자 violato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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