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서래는 보고 해준은 못 본 것
[고광일 기자]
▲ 영화 <헤어질 결심> |
ⓒ CJ ENM |
* 이 기사에는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 75회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을 떠나 박찬욱 감독이 <헤어질 결심>을 통해 이룬 성과는 다층적이다. 형사와 아름다운 피의자가 사랑에 빠진다는 고전적인 설정의 필름누아르로 시작했지만, 남성을 파멸시키는 전형적인 팜므파탈 캐릭터를 벗어난 주체적으로 우뚝 선 서래(탕웨이)의 모던하고 독보적인 개성. 디지털 시대로의 변화를 에둘러 피하지 않고 당당히 내러티브에 편입시킨 과감함으로 동시대성을 갖춘 21세기 클래식의 영역을 두드린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본인의 작품에 항상 녹여냈다고 주장하지만(!), 순순히 인정하긴 어려웠던 멜로 감성을 전면에 드러냄과 동시에 '안개'라는 한 가지의 테마로 자연스레 관객의 심상에 스며들게 해 잊힐 수 없는 순간을 만들어내는 뚝심이다. 세계적인 감독의 재능과 열정, 노력이 138분 동안 짙게 밴 <헤어질 결심>은 보기 드문 감성의 독창적인 멜로 영화로 한국영화사에 기록되기에 충분하다.
<헤어질 결심>은 형사인 해준(박해일)이 근무하는 부산과 원전이 있는 가상의 도시 이포가 배경이다. 알려져있다시피 영화는 가수 정훈희의 노래 '안개'에서 출발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지만 뚜렷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안개'의 정서는 김승옥 작가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에서 흘러나왔다는 심증이 강하다. '공교롭게' 정훈희의 곡은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한 김수용 감독의 영화 <안개>의 주제곡이다.
김승옥이 그린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아서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는' 불가항력적 존재다. 그러나 안개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면 낮과 밤의 기온 차에 의한 응결 현상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다만 밤은 제때 사라지지 못했고 낮은 너무 일찍 찾아왔다고. 제때 만나거나 헤어지지 못한 잘못된 만남이 안개다.
어긋난 타이밍에서 생성되는 안개의 속성이 <헤어질 결심>의 공간적, 정서적 배경이라면 통역 앱, 음성녹음 같은 디지털 요소는 <헤어질 결심>의 세계가 작동하는 원리다. 한국어가 서툰 서래는 쏟아낼 말이 있으면 통역 앱을 쓴다. 통역앱을 거친 말은 감정없는 기계음으로 해준에게 전달된다. 음성으로 녹음한 두 사람의 목소리는 파일 추출-번역-출력을 거쳐야만 전해진다. 메시지와 메신저, 텍스트와 감정의 분리는 두 사람 사이의 끊임없이 어긋나는 커뮤니케이션을 이미지화한다. 동시에 중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해준의 답답함에 관객들이 자연스레 이입하게 만든다.
▲ 영화 <헤어질 결심> |
ⓒ CJ ENM |
<헤어질 결심>이라는 제목은 영화에서 딱 한 차례 등장한다. 이포에서 서래의 두 번째 남편이 살해당한 후 피의자 심문을 받을 때다. 해준은 서래에게 '왜 그런 남자들이랑 결혼을 하냐'고 묻는다. 서래는 '다른 남자와 헤어질 결심을 했다'고 대답한다. 물론 다른 남자는 해준이다. 서래는 해준처럼 (현대인치고) 품위 있고 듬직한 남자를 만나기 전에 결혼했다. 밀항선에서 오물이 묻고 미친 사람처럼 흔들리던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건 가정폭력범으로 변할 기도수 뿐이었다.
서래의 이른 결혼은 서래가 본인과 '같은 종족'임을 본능적으로 알아본 해준에게도 비극이다. 부산에 살고 있는 해준에게는 이포의 원전에 근무하며 15년 6개월 동안 좋은 관계를 이어온 아내가 있다. 하지만 살인과 피가 있어야만 하는 해준에게 원전을 안전하게 가동하며 분석적이고 안정을 추구하는 정안(이정현)은 너무 다른 사람이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주말 부부의 60%가 이혼한다는 불길하고 찝찝한 대사가 단지 유머를 위해 쓰인 건 아닐 것이다.
▲ 영화 <헤어질 결심> |
ⓒ CJ ENM |
해준의 '똑바로 보려고 한다'는 말은 자신이 추구하는 이러한 삶의 태도를 압축한다. 살인사건 현장에서 대부분의 시체는 눈을 뜨고 있는데 해준은 그 시체들이 마지막으로 본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한다. 물론 범인을 잡기 위해서다. 똑바로 보기 위해서 수시로 눈에 안약을 넣는다. 실제로 그는 최연소로 경감을 달고 후배의 존경을 받는 형사다. 적어도 안개가 없는 부산에서는 그렇다.
똑바로 보려는 해준의 노력은 서래를 만난 후부터 본격적으로 삐걱거린다. 미결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사진들을 벽에 붙여놓고 들여다본다지만 벽면의 여백은 늘어나는 사진 탓에 점점 줄어드는 것만 같다. 3년 동안 붙잡고 있었다는 질곡동 사건이 단적인 예다. 서래의 도움이 없었다면 진범인 산오(박정민)를 잡을 수 없거나 시간이 더 지체됐을 거다.
망원경까지 동원하며 서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잠복근무의 성과도 따져보면 변변찮다. 사건의 진실이 밝혀진 결정적 증거는 해준이 똑바로 본다며 찾아낸 게 아니라 사건이 종결된 후 우연히 발견한 '월요일 할머니'의 휴대전화 덕분이었다. 물론 이를 바탕으로 시작된 추리 과정을 보면 그를 유능한 형사라고 판단할 수 있겠지만, 똑바로 본다는 해준의 말에 신뢰도를 높여주진 못한다. 이런 언행의 불일치는 범인 찾기에는 성공했지만 뒤이어 찾아올 비극에 속수무책이던 해준에 대한 치밀한 복선처럼 보인다.
▲ 영화 <헤어질 결심> |
ⓒ CJ ENM |
기도수 사건 종결 후 해준은 이포로 전근을 간다. 화창한 부산과 달리 이포는 정훈희의 곡을 주제곡으로 쓰는 안개의 도시다. 핵발전소에서 연료봉을 냉각시키고 뜨거워진 물, 육지에서 바다로 부는 찬바람이 만나 오전에는 해를 볼 수 없을 만큼 깊고 짙은 안개가 도시를 휘감는다. 똑바로 보기 위해 넣는 해준이 수시로 넣는 안약도 이 안개 속에서는 소용없다. 안개가 모든 사물을 흐릿하게 만드는 이포에서는 똑바로가 아니라 잘 보는 게 중요하다.
해준과 달리 서래는 잘 보는 사람이다. 안개처럼 뿌연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간호사가 되고 밀항선에 타고, 외할아버지가 남긴 호미산은 재판에 져서 나라에 뺏겼음에도 여전히 자신의 산이라고 말하는 강인함도 갖췄다. 법적, 윤리적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을지언정 어떻게든 상황을 개선해보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서래는 원하는 바가 무엇이고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알며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어떤 짙은 안개 속에서도.
▲ 영화 <헤어질 결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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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래는 상의에 12개, 하의에 6개가 달린 해준의 주머니에서 립밤, 사탕을 필요에 따라 자유자재로 꺼낸다. 물티슈 하나를 찾기 위해 이 주머니, 저 주머니 뒤지던 정안과 다르게 말이다. 아침-저녁으로 면도를 하는 사람의 수염이 왜 까칠하게 났는지. 범인을 쉽게 잡기 위해 구두처럼 보이는 운동화를 신던 사람이 가죽구두로 바꾼 마음의 동력이 무엇인지 서래는 알고 있다.
호미산에서 서래는 헤드랜턴을 착용하고 해준을 똑바로 응시하며 질문을 쏟아낸다. 취조실에서 형사가 피의자를 심문하는 듯한 모습이다. 밝은 빛을 정면으로 바라봐야 하는 해준은 눈이 부셔서 무엇도 똑바로 볼 수 없었을 거다. 문자 그대로 보는 것(Watch)에만 집중하던 해준은 서래의 마음을 보려(See)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절벽 끝으로 다가오는 그녀에게서 의심을 완벽하게 지울 수 없던 해준에게 헤드랜턴의 유무는 큰 변수가 되지 못한다.
(통역 앱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서래가 고양이에게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와 달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심장'이라고 알고 있던 해준이다. 정안과 주말부부와 섹스리스 부부의 이혼율 같은 민감하고 사적인 대화를 나눈 직장동료 이 주임(유태오)이 허우대 멀쩡한 남자인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의 감정이 아니라 외부의 사물만을 똑바로 보려 살아온 해준이 자신의 진심이라고 알아챌 리 만무하다.
▲ 영화 <헤어질 결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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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평론가의 <부메랑 인터뷰>에서 박찬욱 감독은 '사랑 영화를 연출하면서도 사랑이라는 말을 안 쓴 채 만들고 싶었다'고 희망했고, 정서경 작가는 '사랑이란 말을 직접 쓰기 싫어서' 멜로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꺼렸다고 한다. 사랑 없는 사랑 영화를 만들고 싶은 박찬욱과 정서경은 이제 해준과 서래의 마지막 대화를 통해 우리를 전혀 새로운 차원의 멜로의 세계로 끌고 간다.
▲ 영화 <헤어질 결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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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유인지 마음에도 안개가 낀다. 마음의 안개는 수시로 안약을 넣는다고 해서 걷어낼 수 없다. 그래서 일찍이 정훈희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안개 속에서 눈을 떠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눈물을 멈출 수 없다고. 영원한 미결을 품은 해변. 똑바로 보겠다던 남자가 꼭 쥐고 있는 랜턴의 불빛은 안개가 걷힌 해변을 집요하게 비추지만, 그 해변에는 파도에 무너진 흙더미와 애타는 울부짖음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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